티스토리 뷰
목차
저도 처음엔 계단에서 숨이

알고 보니 빈혈은 피곤하고 어지러운 증상 정도로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자궁질환부터 위암, 희귀 골수질환까지 — 빈혈은 몸속 심각한 이상을 알리는 첫 번째 신호일 수 있다는 것, 직접 공부하고 나서야 실감했습니다.
위험 신호: 어지럽지 않으면 빈혈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빈혈이라고 하면 빙글빙글 어지럽고 눈앞이 깜깜해지는 장면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공부해보니 전혀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헤모글로빈(hemoglobin), 즉 혈색소는 적혈구 안에 들어 있는 단백질로, 폐에서 받아들인 산소를 뇌와 심장, 근육 등 몸 전체에 공급하는 역할을 합니다. 쉽게 말해 산소를 실어나르는 운반차라고 보면 됩니다. 이 수치가 낮아지면 산소 공급이 줄면서 피로, 숨참, 가슴 두근거림 같은 증상이 나타납니다.
세계보건기구(WHO) 기준으로 성인 남성은 13g/dL 미만, 비임신 성인 여성은 12g/dL 미만일 때 빈혈로 분류합니다(출처: 세계보건기구(WHO)). 그런데 놀랍게도 이 수치가 9 이하로 떨어져야 어지러움을 본격적으로 느끼기 시작합니다. 수치가 정상 이하지만 아직 어지럽지 않다는 이유로 "괜찮겠지"라고 넘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빈혈의 가장 흔한 증상은 어지럼증이 아니라 피로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직장 스트레스나 수면 부족으로 인한 피로와 구분이 쉽지 않기 때문에, 만성 피로가 수주 이상 지속된다면 혈액검사로 헤모글로빈 수치를 확인해보는 것이 맞습니다.
빈혈이 발생하는 원인은 크게 세 가지 경로로 나뉩니다.
- 철분·비타민 B12·엽산 부족으로 적혈구 생산 자체가 감소하는 경우
- 체내 출혈(자궁질환, 소화기 종양 등)로 혈액을 지속적으로 잃는 경우
- 면역계 이상이나 골수 기능 저하로 적혈구가 비정상적으로 파괴되거나 생산이 멈추는 경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인이 다르면 치료도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철분제만 계속 먹어도 나아지지 않는 빈혈이라면, 그 이유를 반드시 따로 찾아야 합니다.
빈혈 뒤에 숨겨진 질환, 피로 하나로 뭉뚱그리면 안 되는 이유
빈혈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무서운 병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자료를 찾으면서 가장 놀랐던 부분은, 빈혈이 심각한 질환을 발견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성의 경우 자궁선근증(adenomyosis)이 대표적입니다. 자궁선근증이란 자궁내막을 구성하는 세포들이 자궁 근육층 깊숙이 파고들어 자라는 질환입니다. 쉽게 말해 원래 자궁 안쪽에만 있어야 할 조직이 자궁 벽 속에서도 증식하는 상태입니다. 그 결과 생리 때 자궁 전체가 부풀었다가 탈락되면서 생리량이 비정상적으로 많아집니다. 이 과다생리가 수개월에서 수년간 이어지면 체내 철분이 서서히 고갈되고, 결국 심한 철결핍성 빈혈로 이어집니다. 2023년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빈혈이 있는 가임기 여성 중 약 26%가 자궁근종이나 자궁선근증 같은 부인과 질환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년 이후 남성이나 폐경 후 여성에게 원인 불명의 철결핍성 빈혈이 나타났다면 소화기 출혈 가능성을 살펴야 합니다. 위암이나 대장암이 있을 때 종양 표면에서 미세한 출혈이 지속될 수 있는데, 양이 워낙 적어 대변 색깔 변화도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빈혈 수치를 추적하다가 위암이나 대장암을 발견하는 경우가 임상에서 1년에 수 건씩 있다는 이야기는, 정기적인 내시경 검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더 드문 경우지만, 재생불량성 빈혈(aplastic anemia)도 있습니다. 재생불량성 빈혈이란 골수 안에서 혈액세포를 만드는 조혈모세포가 면역 세포의 공격을 받아 급격히 줄어드는 병입니다. 적혈구뿐 아니라 백혈구와 혈소판까지 모두 감소하기 때문에, 감염에도 취약해지고 코피가 수 시간 동안 멈추지 않는 증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1년 전 건강검진이 정상이었던 사람도 수개월 만에 중증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질환의 무서운 점입니다. 아시아 지역의 발생률은 유럽·북미보다 두세 배 높습니다(출처: 미국 국립심폐혈액연구소(NHLBI)).
한랭응집소병(cold agglutinin disease)이라는 희귀 자가면역 빈혈도 있습니다. 기온이 낮아질 때 면역계가 자신의 적혈구를 적으로 인식해 파괴하는 질환입니다. 파괴된 적혈구가 뭉쳐 혈전을 형성할 수 있고, 환자는 여름에도 난방기구와 핫팩 없이는 생활하기 어렵습니다. 국내 환자 수가 100~150명 수준으로 추산될 만큼 희귀하지만, 진단 자체를 못 받고 있는 환자도 상당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유전자 치료가 현실이 됐다, 희귀 빈혈 치료의 최전선
제가 이 주제를 공부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치료법의 발전 속도였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평생 수혈에 의존해야 했던 환자들이 이제는 근본적인 치료를 받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한랭응집소병 치료에서는 수팀리맙(sutimlimab)이라는 보체 억제제가 새로운 선택지로 등장했습니다. 보체(complement)란 면역계에서 병원체를 제거할 때 작동하는 단백질 연쇄 반응 시스템인데, 한랭응집소병에서는 이 시스템이 오작동해 자기 적혈구를 파괴합니다. 수팀리맙은 이 반응의 특정 단계를 차단해 적혈구 파괴를 억제합니다. 미국 FDA는 2022년 성인 환자에서 수혈 필요성을 줄이는 용도로 이 약을 승인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국내에서도 임상 적용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연간 치료비가 매우 높아 보험 적용이 핵심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유전성 빈혈 질환에서는 유전자 치료(gene therapy)가 실제 치료로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유전자 치료란 유전자 이상으로 발생하는 질환에서 환자의 세포에 정상 유전자를 직접 주입하거나 비정상 유전자를 편집해 교정하는 방법입니다. 지중해빈혈(thalassemia major)과 겸상적혈구병(sickle cell disease)이 대표적인 적용 대상입니다.
지중해빈혈은 헤모글로빈을 구성하는 알파 또는 베타 사슬이 유전자 이상으로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불완전한 헤모글로빈이 적혈구를 스스로 파괴하는 질환입니다. 겸상적혈구병은 HBB 유전자의 단 하나의 염기 서열이 잘못 바뀌어 적혈구가 정상적인 원반 모양 대신 낫(겸상)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병입니다. 낫 모양 적혈구는 혈관을 막아 극심한 통증 발작과 장기 손상을 유발합니다.
2023년 12월 미국 FDA는 겸상적혈구병을 대상으로 카스게비(Casgevy)와 리프제니아(Lyfgenia) 두 가지 유전자 치료제를 승인했습니다. 특히 카스게비는 크리스퍼(CRISPR-Cas9) 유전자 편집 기술을 활용한 세계 최초의 FDA 승인 치료제로, 의학계에서 역사적인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크리스퍼란 DNA의 특정 위치를 정밀하게 잘라내 편집할 수 있는 분자 가위 기술입니다.
더 나아가 하버드대학의 데이비드 리우(David Liu) 교수 연구팀이 개발한 염기 교정(base editing) 기술은 DNA 이중가닥을 자르지 않고 단 하나의 염기만 선택적으로 바꿀 수 있어 기존 크리스퍼보다 정밀합니다. 이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한 프라임 교정(prime editing)은 짧은 염기서열 자체를 통째로 바꿀 수 있어 더 복잡한 유전자 이상도 교정이 가능합니다. 겸상적혈구병 환자 브랜든은 이 염기 교정 임상에 참여한 뒤 통증 발작 없이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고 취업까지 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 분야의 발전 속도는 불과 5년 전과 비교해도 체감이 다를 정도입니다.
물론 이 치료들이 모든 환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치료 전 강도 높은 전처치 과정이 필요하고, 치료비 문제와 장기 추적관찰의 안전성도 계속 확인이 필요한 단계입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선택지 자체가 없었던 환자들에게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어지럽지 않은데 빈혈일 수 있나요?
A.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빈혈은 어지럼증이 먼저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헤모글로빈 수치가 9g/dL 아래로 떨어져야 어지럼증이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그 전까지는 피로감이나 가벼운 숨참 정도만 느낄 수 있어서 빈혈인지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강검진에서 혈색소 수치가 정상 이하로 나왔다면 증상 유무와 관계없이 원인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Q. 철분제를 먹으면 빈혈이 낫지 않나요?
A. 철결핍성 빈혈이라면 철분 보충이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자가면역 질환이나 골수 기능 이상, 소화기 출혈처럼 철분 부족이 아닌 원인으로 빈혈이 생긴 경우에는 철분제를 먹어도 수치가 나아지지 않습니다. 원인을 확인하지 않고 철분제를 장기 복용하면 정작 치료해야 할 질환 발견이 늦어질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합니다.
Q. 남성도 빈혈이 생길 수 있나요?
A. 물론입니다. 빈혈이 가임기 여성에게 많다고 알려져 있지만, 성인 남성이나 50세 이후 남성에게 철결핍성 빈혈이 생겼다면 오히려 소화기 출혈 가능성을 더 적극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위암이나 대장암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 출혈을 일으키면서 빈혈로 먼저 나타나는 경우가 임상에서 드물지 않기 때문에, 내시경 검사를 권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Q. 재생불량성 빈혈은 완치가 되나요?
A. 중증 재생불량성 빈혈은 조혈모세포 이식을 통해 완치 가능성이 90% 이상으로 보고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이식 후에도 이식편대숙주반응(GVHD)이라는 합병증, 즉 이식받은 세포가 환자의 몸을 공격하는 반응이 나타날 수 있어 일정 기간 면역억제 치료와 추적관찰이 필요합니다. 치료 성적은 연령과 이식 공여자 일치 여부에 따라 달라집니다.
Q. 한랭응집소병 치료제는 국내에서도 맞을 수 있나요?
A. 현재 국내에서도 수팀리맙(sutimlimab) 계열 치료가 일부 중증 환자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러나 치료비가 매우 높고 보험 적용 여부가 아직 제한적이어서, 실제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자 수는 극소수입니다. 관련 전문 의료기관(혈액내과)에서 중증도 평가를 받고 보험급여 적용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 현실적인 첫 단계입니다.
결론
제가 이 내용을 정리하면서 반복해서 든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빈혈을 단순히 "피곤한 사람들이 흔히 겪는 것" 정도로 보는 시각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입니다. 어지럽지 않아도 빈혈일 수 있고, 철분제로 수치가 일시적으로 올라도 출혈 원인이 사라진 게 아닐 수 있습니다. 반층 올라 쉬고, 다시 반층 올라 쉬어야 했던 분들의 이야기가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만성 피로가 지속되거나 건강검진에서 혈색소 수치가 정상 이하로 나왔다면 혈액내과나 내과를 방문해 원인을 확인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가임기 여성은 산부인과도 함께 확인할 필요가 있고, 중년 이후 남성은 소화기 내시경 검사를 검토해볼 만합니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심코 넘기지 않는 것, 그게 건강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